정보화마을 서귀포 월평화훼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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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부분의 마을사람들은 월평동이 設村된 시기를 甲寅年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며, 古阜李氏들이 설촌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생각하고 있다.
    고부 이씨들이 도순에서 월평으로 이주할 때에 숙질간에 이주했다고 구전된다. 호적중초를 통해 살펴보면 이 숙질은 宗旭과 慶實이다.

    숙부인 종욱은 경실보다 나이가 5살 아래였으며 월평에 오래 거주하지 않고 다시 도순으로 돌아간 듯 하다.
    그리고 경실도 이주당시에 이미 나이가 60이나 되어 실질적인 설촌의 주체가 되지는 못하였던 것 같다.
    실제로 설촌이 이루어진 것은 경실의 아들대에서다. 경실에게는 삼형제가 있었으며 그들은 각각 赫彬, 仲彬, 恒彬이다. 이중 仲彬은 이주 당시에 도순에 남아 있었으며 장남인 赫彬도 자식 세대까지는 월평에 살았으나 그 이후에 다시 도순으로 돌아가 현재 월평에는 그의 후손 두 가구만 살고 있을 뿐이다.
    고부이씨들에 의해 실제적인 설촌 조상으로 인정되는 사람은 恒彬이다. 월평동은 마을의 형성초기부터 주위의 마을들과 밀접한 관련성을 갖고 있었다.
    마을의 구성원들이 하원, 도순에서부터 이주하여 왔을 뿐 아니라 강정과는 유사한 생계방식을 근거로 하여 일정한 관계성을 유지하고 있었다.

    또한 월평동은 마을 형성 이후 상당기간 동안 독립된 마을로 인정되지 못하고 도순의 일부로 간주되었다. 월평동이 오늘날과 같은 마을 형태를 취하게 된 것은 4.3항쟁이후이다.

    1941년당시 건축되었던 문화관은 이전까지는 마을회의나 주민이 함께 모여야 할 일이있으면 고부이씨 종가집에서 모이고는 하여 주민이 함께 모이기에는 늘 좁아 불편하였는데 재일교포들의 도움으로 마을화관이 건축됨으로써 이러한 문제는 해결되었다. 4.3사건당시 민보단의 본부로 사용되기도했으며 1960년 정부지원으로 재건축되었다.

     

    현재 마을 공덕비들이 세워져 있는 시내버스 정류장 부근은 해안과 가장 가까운 곳으로서 마을 사람들의 표현대로 달 내부의 정기가 바다로 빠져 나가는 형상이어서 이것을 막기 위해 아웨낭을심었다고 한다. 또한 여기에 있는 공덕비들은 충혼비와, 1960년대 이후 마을 개발사업당시 세워진 기념비, 문화관 건립에 도움을 준 재일교포들의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월평마을은 4.3항쟁으로 인한 피해가 상대적으로 적었는데 그것은 마을 사람들이 성을 쌓아 산사람들로부터 침입을 막았다고 한다. 그때 축성되었던 성은 마을을 돌아가며 원형으로 축성되었고 성의 출입구는 아웨낭목과 잔골가는 길목, 그리고 동카름 부근에 있었다. 성을 쌓은 뒤부터 초소막에서는 매일밤 당번을 섰는데 성담은 대부분 훼손되어 지금은 흔적을 찾아볼수 없다.